이게 벌써 몇 번째 하루키 에세이집이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달리기를 할 때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라디오, 일상의 여백,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잡문집. 그리고 이번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아마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만 읽는다면 이제 그만 읽겠지.
하루키의 소설도 꽤 읽었지만 에세이만큼 재밌지 않다. 본업은 소설가지만, 소설이 맥주고 에세이가 우롱차라면 이왕이면 세계 최고의 우롱차를 만드는 맥주회사가 되어보겠다고 했었나? 거참, 나는 이미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맥주회사가 만드는 우롱차에 푹 빠져버렸다. 귀사의 스테디셀러 맥주보다 사이드 음료가 내 스타일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은 1980년대 말 비교적 젊은 하루키의 에세이집이다. 아직 세계적인 거장의 명성을 얻기 전이었고, 주목받는 신예 일본 소설가로 부상해 명성을 쌓아가는 단계 정도 일 거이다. 아직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쓴 에세이지만 시대와 상관없이 너무 재밌다. 일본의 특유한 겸손한 듯한 말투와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새삼스런 표현이 어울려 재미를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그중'왜 나는 이발소를 좋아하는가'에서 이발소를 선호하는 남자로서 꽤나 공감이 갔다.
지금도 젊은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만 젊은 하루키의 젊은 글은 요즘 에세이와 소설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었다. 요즘에는 거장의 풍미와 연륜이 살짝 묻어 나오고, 에세이더라도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 깊이가 다르다면 이번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은 아직 사회활동 이야기도 잦고, 좀 더 어린 생각을 담았다 갈까. 젊을 때부터 좋은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라는 점을 알려준다. 이번 글을 통해 하루키의 젊은 시절은 강제 미니멀리스트를 할 정도로 가난했다는 것, 한때 아내가 일을 나가고 하루키가 가정주부를 한 적이 있다는 점을 알았다.
소설가가 되기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절에 쓴 글인 만큼 전업 소설가로 되기 전 생활에 대한 언급도 다른 책에 비해 잦다. 그리고 안자이 미즈마루라는 일러스트레이터와도 꽤 친한 듯하다. 몇 번의 에세이집에서 그를 다뤘으며, 이 책의 일러스트도 그가 담당했다. 개인적으로 샐러드를 먹는 사자의 일러스트를 그린 일러스트레이터가 더욱 내 스타일이지만, 안자이 미즈마루 이 사람도 꽤 재밌는 그림을 그린다. 하루키의 문체와 글 내용에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그리고 느꼈던 점은 '이 사람 꽤 젊었을 때부터 자기 삶에 대한 철학과 가치관이 확고하고,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는 스타일이군.'이다. 소설가가 되고 나서도 생활 패턴이나 소비 관념 등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그냥 원래 살던 것보다 더 여유로운 편이 된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다르게 살거나, 유명 소설가의 명성을 인식하고 허영을 부리지 않는 듯하다. 소설가로 유명해진 것에 덤덤하며,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며, 자신이 믿는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 밑줄 친 구절
"가능한 한 사소한 일에 안달복달하지 않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일도 하지 않으며 느긋한 나날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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