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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에세이 수필집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를 읽고서

by cardo 2020. 3. 24.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 잡지 <앙앙>에 연재한 에세이 '무라카미 라디오'의 1년 분을 모은 책이다. 책을 읽다 보면 정말 라디오 인트로 내용 같다. 그저 일상의 담백한 멘트와 생각으로 시작하고 끝맺는 가벼운 글이랄까.

 

중년 남성 소설가가 왜 잡지 <앙앙>에만 게재하냐 라는 질문에는

'하지만 차라리 '공통된 화제 따위 없다'라고 마음먹으면 되레 쓰고 싶은 것을 편하게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어느 시점에 깨달았습니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까 같은 건 차치하고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내가 재미있다고 느낀 것을, 자유롭고 즐겁게 줄줄 써나 가면 그걸로 되지 않을까 하고. 아니, 그렇게 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을까, 그런 배짱이 생겼습니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난 이때 함박 미소를 지으며 '하루키 이 아저씨 좀 재밌네?'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기대했다.

 

밑줄 친 구절

사랑은 가도, '친절심'이라는 토픽

'에세이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 때 친절심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되도록이면 상대가 읽기 쉬우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시도해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알기 쉬운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각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거기에 맞는 적절한 말을 골라야 한다.'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에 '사랑은 가도 친절은 남는다'는 말이 있다. 이것도 아주 멋있죠.'

 

죽도록 지루한 대화

'영어를 '회사 내 공용어'로 삼으려는 일본 기업도 있는 것 같은데, 뭐,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동시에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육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 점을 놓치면 세계 어딘가에서 또 서루씨 같은 가엾은 희생자가 나오게 된다.'

 

모릅니다. 알지 못합니다.

'소설가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날마다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되고 회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뭐랄까, 정말로 좋다. 내가 모르는 것을 까놓고 "모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만큼 편한 일도 없다.'

'분명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의욕 일터, 그런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자신의 등을 밀어주듯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일단 소설을 쓰고 있지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큰 소리로 분명히 하고, 아니면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짧은 점쟁이 경력

'소설을 쓰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을 관찰해야 하고, 작중 등장인물을 구체적으로 통찰해야 한다.'

 

자, 여행을 떠나자

'요컨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행은 예정에 없던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즐겁다는 것이다.'

 

가을을 툭툭 차며

기야마 쇼헤이의 <가을><쇼와 8년>

새 나막신을 샀다며

친구가 불쑥 찾아왔다.

나는 마침 면도를 다 끝낸 참이었다.

두 사람은 교외로 가을을 툭툭 차며 걸어갔다.

 

그런가, 좀처럼 잘 안되네

'세상 사람 대부분은 실용적인 조언이나 충고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맞장구를 원하는 게 아닐까?'

 

내가 죽었을 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그저 바람을 생각해라."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소설 <마지막 문을 닫아라>의 마지막 한 줄. Think of nothing things, think of wind.

 

낮잠의 달인

'인생을 길게 살다 보면 심한 말을 듣거나 심한 처사를 당하는 경험이 점점 쌓여가기 때문에 그냥 예사로운 일이 돼버린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내가 어디 있는지, 지금이 언제인지 잊어버릴 때가 있다. 은근히 좋습니다.'

 

컵에 반

'소설가에게 또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기본이 낙관적이라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안닌가, 늘 생각한다. 이를테면 장편소설 집필에 들어갈 때는 '좋아, 이건 꼭 완성할 수 있어'하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 능력으로는 이걸 다 쓸 수 없을지도'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 이것은 낙관적이라기보다 그저 뻔뻔스러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가난해 보이는가

'그러나 가게 주인은 "당신이 누구든 거지 차림을 하면 거지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쫓아냈다고 하는 얘기로 기억한다. 미친놈인 척하고 알몸으로 거리를 달리면 그건 바로 미친놈이다.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일단 올바른 세계관이다.'

 

말도 안 되는 거리, 험한 길

'지방을 빼면 사람의 지적 활력을 왕성하게 한다고 믿었다.'

 

신호대기 중의 양치질

'여자관계에 관해 말하자면 '그때,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도 있을 텐데"하는 사례는 몇 번이나 있지만 그건 특별히 후회할 정도의 일은 아니다.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것은 일종의 가능성의 저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젖은 바닥은 미끄러진다.

'아름다운 것, 바른 것은 사람 각각의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말은 그 감각을 반영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물론 말은 소중히 해야 하지만, 말의 진짜 가치는 말 그 자체보다 말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관계성 속에 있는 게 아닐까?'

 

제일 맛있는 토마토

'에세이를 연재하다 보면 '꼭 쓰게 되는' 토픽이 몇 가지 나온다. 내 경우, 고양이와 음악과 채소 이야기가 아무래도 많다. 역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는 것은 즐거우니까. 기본적으로 싫어하는 것, 좋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기로,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다. 읽는 분들 역시 '이런 건 진짜 싫다. 짜증 난다'하는 문장보다 '이런 글 진짜 좋다. 쓰다 보면 즐거워진다' 하는 문장 쪽이 읽고 나서 즐거우시죠? 으음, 그렇지도 않으려나? 잘 모르겠다.'

 

전체 평

내 생애 최고의 에세이집이 아닐까? 물론 하루키라서 빛이 나는 듯한 플라시보 효과도 있다. 다만, 자기가 좋아하는 소재, 생각나는 대로, 일상 속에서 생각했던 내용을 가볍고 재밌게 라디오에서 디제이가 말을 건네듯이 한 글이 너무 재밌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온 일러스트가 완전 내 스타일이다. 오하시 아유미? 꾸준히 해당 잡지인 <앙앙>에 일러스트를 실었다고 하는데 어쩜 그리 내 스타일인지. 내가 추구하는 가볍고 단순하지만 익살맞고 그럴싸한 드로잉이다. '내가 꼭 드로잉과 스케치를 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어'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지친 일상 속 좋은 에세이집을 읽으면서 내 마음과 몸을 달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즐겁고 가벼운 에세이집!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국내도서
저자 : 무라카미 하루키(Haruki Murakami) / 권남희역
출판 : 도서출판비채 201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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