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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에세이 수필집

테니스 에세이집 끈이론 String theory을 읽고, 북 리뷰

by cardo 2020. 2. 19.

테니스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테니스에 관한 에세이는 거부할 수 없는 아이스크림 같았다. 그 맛이 너무 달아 혀가 얼얼하든, 끈적끈적해서 숟가락으로 퍼기 어렵든 일단 먹게 된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의 에세이는 나에게 좋아하는 맛과 아닌 맛이 섞인 파인트 아이스크림 같았다. 때로는 의무감에 때로는 즐거움에 취해 읽었다.

 

문장이 왜 이리 길고, 꼬이고, 알아듣기 어렵고, 수사학적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번역가 능력 탓도 하고, 과연 이 영문이 좋은 글인가 의심을 했다. 다 읽고 나서 옮긴이의 말을 보니 이 책의 작가인 데이비드의 본래 특성이라고 한다. 번역가 양반도 꽤 고생했겠다. 글쓴이의 긴 문장과 그 안에 수많은 수식과 비유, 표현 그리고 그걸 다 읽고(번역하고) 난 뒤의 쾌감이 그의 문장이 가진 매력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서서히 적응되더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긴 문장을 읽고 나서의 느낌은 긴 터널을 지나 밝아지는 기분이랄까(허세)

 

첫 에세이는 지독히 지루했다. 책 선택을 후회하고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 저자의 어린 시절 테니스를 처음 접하고, 주니어 선수로 활동했던 이야기인데 감흥도 재미도 없었다.

 

두 번째 에세이부터 조금씩 빠져들었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테니스)니까. 다 먹을 수는 있겠다 싶었다. 세 번째부터는 맛없는 부분이 끝나고 맛있는 부분이 시작되었다. 베스킨라빈스로 따지면 녹차맛을 끝내니 엄마는 외계인 맛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개인적 선호)

 

테니스라는 스포츠의 과학적 사실, 스포츠학적 통계와 인간적인 매력을 골고루 느낄 수 있게 만든 책이다. 내가 몰랐던 과거 남성 프로 테니스계와 유명 테니스 스타 뒤의 수많은 무명의 프로들을 다룬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더러 모멘트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했다.

 

첫 에세이는 작가 자신의 유년시절에 겪었던 테니스 경험담, 두 번째는 잠깐 반짝 타올랐던 여성 프로 테니스 선수의 자서전에 대한 이야기, 세 번째는 무명의 어느 미국인 프로 테니스 선수의 캐나다 오픈 참전과 관련 이야기, 네 번째는 유에스 오픈 참관을 통한 그랜드슬램의 상업주의, 마지막은 그 유명한 페더러 이야기다.

 

시간순이면서, 이 책의 이야기에 잘 빠져들 수 있는 순차라 마음에 들었다. 나는 페더러가 이미 테니스 황제로 등극한 이후 테니스를 접했기 때문에 이미 기존의 테니스 팬들과 선수들이 페더러를 처음 본 순간의 그 충격을 알지 못하는데 저자는 현대 테니스의 이단아이자 정복자인 페더러의 경이를 세세하고 깊게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에세이는 네 번째였다. 우리가 어느 프로 스포츠 세계를 떠올리면 그 세계의 슈퍼스타 몇몇만 떠올리기 쉽다. 프로 축구라 하면 메시, 호날두 그리고 몇몇이 쉽게 떠오른다. 하지만 전 세계에 수백 명, 수천 명의 프로 축구 선수들이 있다. 

 

테니스는 개인 스포츠다. ATP 랭킹으로 프로 테니스 플레이어의 순위를 매기는데 1위부터 10위까지만 기억되기 쉽다. 오랜 시간동안 인지도 1위는 페더러, 나머지 수백 명의 프로 선수들은 그저 병풍, 파운데이션이다. 페더러가 딛고 서 테니스 황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한 수많은 상대에 불과하다. 저자는 그런 흔한 프로 선수 중 한 명을 주목하여 글을 쓴다. 유명하지 않고 뛰어난 성적은 내지 못하지만 그런대로 프로 세계에서 먹고사는, 조용히 담담히 훈련하고 경기하고 랭킹 포인트를 올리고 나아가는 그런 한 명의 선수를 주목하는데, 그게 와 닿았다. 

 

테니스 애호가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책이다. 테니스에 대한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낀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밑줄 친 구절

 

위대한 선수들이 곧잘 '내추럴'이라고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들이 경기 중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능과 근육 기억과 자율 의지에 기대어 자신의 행위와 혼연일체가 될 수 있다.
최상급 운동선수의 천재성 배후에 있는 진짜 비밀은 침묵 자체만큼이나 난해하고 명백하고 단순하고 심오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선수가 적대적인 관중의 함성 한가운데에서 승부를 결정지을 자유투를 던지려고 준비할 때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진짜-또한 여러 겹의 베일에 둘러싸인-대답은 '아무것도'일 것이다.
트레이시 오스틴 1989년 자동차 사고 이후에 "나는 여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재빨리 받아들였다" 썼는데, 만일 이 문장이 사실일 뿐 아니라 그녀가 겪은 수용 과정 전부를 '오롯이 묘사'한 것이라면 어떨까?
천재는 재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감은 전염되며 형태가 다양하다. 힘과 공격성 아름다움 앞에서 맥을 못 추는 광경을 가까이서 보기만 해도 영감과 (찰나의 필멸자적인) 조화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