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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쿠바에는 두 세계가 있다

스물 다섯번째 이야기, 테니스는 꼭 치고 말테야

by cardo 2020. 4. 29.

나와 쑤가 테니스에 빠진 게 벌써 2년째다. 멕시코와 쿠바 여행에서도 혹시 모를 기회 때문에 테니스 라켓을 챙겼을 정도다. 장기간 여행하기에 테니스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꼭 해보고 싶었다. 멕시코 시티에서는 숙소 인근에 올림픽 공원이 있어 코트를 빌려 쳤고, 칸쿤에서는 올인클루시브 리조트에 딸린 근사한 코트에서 쳤다.

 

아바나에서는 열심히 찾아봤지만 근사한 귀족 스포츠이자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테니스'라는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구석은 없었다. 어렵사리 에어비앤비 트립에서 '아바나에서의 테니스'라는 프로그램을 찾았지만 일정이 맞지 않고 거리도 꽤 멀었다. (에어비앤비의 풀은 대단하다. 아바나에서 테니스 레슨 프로그램을 찾을 줄이야)

 

그래서 아바나에서의 한 달은 꽤나 테니스 가뭄기였다. 급기야 난 짐 쌀 때마다 '어휴 저놈의 테니스 라켓은 왜 챙겨서! 얼마 하지도 못하는데'라는 푸념을 늘어놓아 혼난 적도 많다. (슬슬 난 매를 벌어서 맞는 스타일이구나 싶다)

 

내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바나 국립 대학 캠퍼스가 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꽤 크고 예쁜 건물 양식을 자랑하고 있어서 몇 번 방문해서 구경하고, 쉬기도 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같으면서도 유럽의 캠퍼스 같은 건물처럼 지었는데 건물은 몇 없으나 입구가 굉장히 크다. 넓고 긴 계단으로 올라가면 아고다 같은 광장이 나오고 그 광장을 ㅁ자로 강의동들이 둘러쌓다. 광장에는 나무도 푸르게 자라 있어서 근사한 고대 그리스의 아카데미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거대한 캠퍼스와 바글바글한 대학생에 비교하면 매우 한산하고 조용한 편이지만 가끔 시간대가 맞으면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강의실을 나오는 모습이나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떠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어느 날 우리는 아바나 대학 근처에 위치한 정원을 구경하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다시 돌아왔다. 대학교 근처에는 꽤 가성비 좋은 맛집을 한군데 찾아놔서 자주 갔다. 든든하게 구운 닭고기와 잡곡밥, 잘게 썬 야채와 튀긴 고구마를 먹은 뒤 캠퍼스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몇 명 없었으나 남학생 다섯 명과 여학생 세 명 정도가 모여 계단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중 한 남학생이 테니스 라켓을 백팩에 넣고 무슨 공으로 이리저리 장난치며 돌아다니는 걸 봤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신이 나서 "여기 근처에 테니스 코트나 체육시설이 있나봐, 쟤 테니스 치는 거 아냐?"라고 쑤에게 말했다. 쑤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답했다. 나는 용기를 내 그 학생에게 다가가 영어를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영어를 할 수 있다고 답했다. 

 

"너 테니스 라켓이랑 공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데 혹시 테니스 쳐?"

"아니, 테니스는 안 쳐. 이건 000이라고 하는 거야(그 스포츠 이름을 까먹었다)"

"그래? 그건 뭔데?"

"테니스 라켓으로 고무볼을 벽에 치면서 주고받는 야외 스포츠야."

 

아마 스쿼시같은 운동인 것 같았다.

 

"그럼 여기 근처에 혹시 테니스 코트는 없니?"

"없어. 테니스 코트는 없는 걸로 알아."

"넌 이거 어디서 쳐?"

"여기 캠퍼스에서 서쪽 문으로 나간 뒤 조금 걸어가면 종합 체육 운동장 같은 곳이 있어, 거기에 코트가 있어."

 

학생은 유창한 영어로 친절하게 답해주고 설명해줬다. 나는 연신 고맙다면서 다시 쑤에게 달려갔다.

 

"아쉽게도 테니스 코트는 없대. 쟤는 000이라는 걸 하는데 약간 스쿼시의 일종같아. 테니스 라켓으로 고무공을 벽으로 쳐서 튕겨 나오는 걸 주고받는대."

"그래? 아쉽다. 어쩔 수 없네."

"근데 여기 근처에 그 코트랑 운동장이 있대. 우리 가보자!"

 

서쪽에 나온 쪽문 같은 출입구로 나왔다. 근처에 프린트 복사집, 작은 문방구 같은 가게도 있었다. 새삼 '대학가는 대학가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조금 걸으니 운동장 스타디움 출입문이 보였다. 돈을 내야 할까 봐 조심스레 들어갔는데 입구에 앉아있는 직원 분은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 

 

1층으로 쭉 들어가니 큰 야외 운동장이 나왔다. 1층 출입문은 운동장 스탠드석이랑 이어져있고 스탠드석은 운동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에 있었다. 한눈에 종합운동장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운동장은 낡고 어두웠다.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컨디션이었다. 축구 골대 두 개 사이에 잔디들은 거의 죽어 있고, 듬성듬성 나있었다. 멀리 야외 수영장이 보였다. 아니 야외 수영장이었던 곳이 보였다. 파랗게 칠해진 네모난 구멍들은 과거에 수영장이었음을 보여주는 민낯이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계절 때문이 아니라 운영을 안 한지 오래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 수영장의 오른편에 무너질 듯한 콘크리트 벽이 있었다. ㄴ자로 보였고 땅에는 하얀색 선이 그어져 있었다. 어느 한 명이 공을 치며 놀고 있었는데 아까 캠퍼스의 남학생이 설명해준 스포츠처럼 보였다. 

 

테니스 라켓으로 고무공을 벽으로 치는 그 운동. 

 

벽은 공에게 하도 맞아서 마지막 라운드가 끝난 복서의 얼굴 같았다. 반질반질하고 치인 흔적이 빽빽했다. 곧 무너진다 해도 신기하지 않을 벽이었다. 

 

난 갑자기 혼자 시무룩해졌다. 가슴속 깊이 울컥하면서 뭔가 움직였다. 쑤는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나는 경기장을 나갈 때까지 아무 말하지 않았다.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감정이 진정되자 말했다.

 

"나도 왜 이런지 모르겠어." "그냥 저 학생들이 여기서 놀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그냥"

 

동정은 아주 오만한 놈이다. 난 그 학생의 신발을 신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화도 나고 무언가 답답하고 그랬다. 내 또래 혹은 나보다 조금 어린 친구들일 텐데. 대학생일 정도면 나름의 괜찮은 집에서 살던 친구일 가능성이 높을 텐데. 그런 친구들이 누릴 수 있는 체육시설 마저 이렇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다. 오만한 생각이다. 내가 동정할 자격도 이유도 전혀 없다.  부끄럽지만 마음 속으로 쿠바의 미래를 빌었다. 자본주의니, 뭐니 필요없고, 그냥 쿠바 젊은이들이 더 나은 시설과 인프라에서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