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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쿠바에는 두 세계가 있다

스물 네번째 이야기, 빈티지 천국 쿠바야 변하지 말아줘

by cardo 2020. 4. 28.

예쁘게 낡은 것들에 야릇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생각보다 많은 동지들이 있겠다고 예상하지만 나는 반들반들 손때 묻은 것들을 좋아한다. 오래 쓴 할머니의 손수건, 반들반들 윤이 나는 가죽 제품, 깔끔하게 관리되었지만 살짝 낡아 편한 옷가지들을 사랑한다. 지금의 플라스틱 콜라병보다 오래전 초록빛이 도는 콜라 유리병을 더 좋아한다. 

 

이런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레트로, 빈티지 감성에 열광한다. 1년 전 쿠바 여행 붐이 일어나고, 빈티지 올드카와 건물들에 열광하는 이유는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로 레트로 감성이 덕분이다.

 

쿠바는 정말 말 그대로 빈티지 천국이다. 걷다가 채이는 것들이 빈티지다. 생활 빈티지. 빈티 나는 것에 가까운 레트로 물건들이 많다. 그것이 바로 쿠바 여행의 진또배기 매력이다.

 

잠깐 쿠바의 빈티지 매력을 의식주로 나눠 생각해보자.

 

많은 쿠바 현지인들은 낡은 옷을 입고 있다.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이라거나 깨끗한 새 옷을 입은 사람은 찾기 어렵다. 낡고 해진 옷들을 많이 입고 있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잘 관리된 낡은 옷들이라는 점이다. 음식을 마구 묻히고 다니거나, 구멍이 숭숭 뚫린 채 그냥 막 입는 게 아니다. 쿠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색깔 맞춤도 잘하고, 잘 세탁해서 소중히 관리하여 입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잘 관리해서 오래 입는다는 것은 그들이 원해서라기보다는 공산품이 부족해서 그럴 것이다. 

 

건물들도 낡았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면 형형색색 무지개 빛깔과 원색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건물들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모두 낡고 곰팡이 피고, 부식되어 있다. 내가 한 달간 지낸 아파트도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이다. 층고는 엄청 높은데 조명은 밝지 않아서 항상 저녁같다. 화장실이나 부엌도 예전 스타일 그대로다. 그런데 깨끗하다. 주인이 매주 2회 청소해주는 데다 청소하고 나면 반짝 윤이 난다. 꼼꼼하게 구석구석 쓸고 닦은 티가 난다. 혼자 살아본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청소한 티가 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정말 청소한 티가 나고, 관리의 손길을 받은 집이다.

 

다른 건물들도 낡았다. 아바나 국립 대학교에 갔는데 계단을 올라가다 오줌 지린내가 엄청 나서 식겁한 적이 있다. 곳곳에서 낡고 해진 냄새가 난다. 맞다. 건물에서 낡은 냄새가 난다. 오래된 콘크리트의 냄새가 나고, 하수 처리와 환기 시설이 미비하여 오래 묵은 공기가 그대로 코에서 느껴진다. 국가 시설에도 그렇고, 미술관도 그랬다. 아직 쿠바에서는 새롭게 단장한 건물보다는 오래전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겪은 건물들이 더 많다.

 

먹는 것도 오래된 양식 그대로다.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쿠바 가정에서는 잡곡밥이나 배급빵에 구운 닭고기 그리고 오이, 양배추, 토마토를 썰어 함께 먹는다. 소스도 귀하다. 물론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가는 레스토랑에서는 다양한 향신료와 새로운 스타일의 음식을 선보이지만, 대다수 현지 식당과 가정식은 그렇지 않다. 향신료가 적어 담백하다. 달고 짠맛이 난다. 설탕과 소금만은 넉넉한 듯하다. 

 

고구마튀김도 그렇고, 구운 닭고기에서도, 쿠바식 잡곡밥에서도 오래된 편안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무난하다. 맛있지 않지만 먹을만하다. 영양 섭취는 제대로다. 약간 보디빌더가 몸을 만들 때 먹는 것 같다. 데친 브로콜리와 닭가슴살 그리고 고구마만 먹는 그런 식단.

 

외국인 관광객 대상의 식당들도 약간은 트렌드에서 빗겨나가 있다. 정말 힙한 카페 한 곳을 본 것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오래전 유행했던 휴양지 콘셉트이다. 나이 많은 배불뚝이 웨이터 아저씨가 그럴싸하게 흉내 낸 피나 콜라다를 능숙하게 만들어준다. 낡고 퇴색했지만 그런 세월의 진한 맛이 느껴지는 곳들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아직 쿠바에는 오래된 것들이 많다. 변하지 않은 것들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많은 여행자들이 쿠바가 변할까봐 걱정한다. 내가 여행한 작년 4월에도 조금씩 변화의 물결이 느껴졌다. 고급스럽게 단장한 호텔이나 식당, 새롭게 짓고 있는 대형 건물이라던가.

 

2015년 당시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쿠바를 방문하고 수교를 재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쿠바 아바나에도 스타벅스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이 소문을 듣고 과감하게 쿠바 여행을 결정했다. '가야지, 언젠간 꼭 가봐야지'하는 마음에서 "미쳤다. 당장 가야겠다. 스타벅스 들어오기 전에 쿠바를 봐야겠어!"라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다른 여행에서는 깔끔한 흰 침대 시트의 호텔과 유명한 맛집에서 음식을 먹고 싶지만, 쿠바에서만큼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벗어난 경험을 쌓고 싶었고, 쿠바에서만큼은 불편해지고 싶었다. 그런 쿠바가 좋다. 자본주의의 여파로 쿠바가 편해지기 전에, 빈티지 천국에서 어중간한 관광객 천국으로 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