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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쿠바에는 두 세계가 있다

스물한 번째 이야기, 아바나 경찰서 두번째 방문기

by cardo 2020. 4. 27.

트리니다드 여행을 출발하기 전 쑤는 아이폰을 잃어버렸다. 도난과 분실 그 사이인데,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듯 마트 계산대에 올려두고 깜박한 사이 누군가 가져간 것이다.

 

처음으로 아바나에 위치한 경찰서를 찾아가고, 사건 접수도 하고 진술서도 작성했다. 물론 호텔 로비 직원의 간이 통역으로 도움을 받아 경찰관이 대리 작성해준 것이지만. 

 

다시 한번 더 방문하라고 했으나, 우리는 일정이 있어 트리니다드 여행이 끝난 다음 월요일에 방문하겠다고 했다.

 

쑤는 꼭 아이폰을 되찾고 싶어 했다. 돈이 아까운 것은 둘째고, 그 속에 들어있는 소중한 사진들이 많기 때문이다. 쑤는 은근히 철저한 성격이라 틈틈이 백업을 하고 데이터를 관리한다. 여행을 시작한 멕시코에서부터 백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이폰 속에 모든 여행사진이 들어있었는데, 그게 통째로 날아간 것이다. 당시 쑤의 신경은 날카롭고 컨디션도 좋지 못했다. 아슬아슬했다. 폭발 직전에 꺼진 폭탄의 도화선이랄까. 불티만 살짝 날려 약간만 타버려도 터질 듯한 폭탄이었다. 난 가끔 눈치도 없이 폭탄들을 빵빵 터트렸고 그 폭발의 피해는 고스란히 내가 받았다. 

 

꼭 찾고 싶었기에 어떤 수단이든 강구하고 싶었다. 아바나 까사 주인 '르네'에게 이야기하고 부탁했다. 우리가 여행을 마친 뒤에도 아이폰을 찾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기 때문에 네가 받아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착한 르네는 흔쾌히 허락했고 함께 경찰서로 방문하기로 했다.

 

월요일 이른 아침 예의 그 쾌활한 표정과 우아한 손놀림으로 인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함께 구아구아(아바나 시내 버스)를 타고 경찰서로 찾아갔다. 르네는 차가 없거나 기름값이 아까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듯했다. 르네의 본업은 오토바이 수리다. 여기도 가내수공업이다. 집 한편에 오토바이 수리 용품과 시설을 갖추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듯했다.

 

버스를 타고, 내리고 난 뒤 걸어가면서 떠듬떠듬 이야기를 나눴다. 르네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그래도 쿠바 중산층의 생활과 르네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조금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미국에 사는 약혼녀가 있다. 푸에트리코계 미국인으로 뉴욕에 살고 있고, 기회가 될 때마다 휴가를 써서 쿠바에 방문한다. 이른바 '롱디 커플'이다. 다정하게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다음 여름휴가를 기다린다고 했다. 이탈리아에 여동생이 지내는데 그때 함께 온다고 했다. 나는 르네에게 그녀가 있는 미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냐고 물었다. 보고 싶지만 미국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난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서에 도착하고 우리 전담 경찰관의 이름을 댔다. 오늘은 그 담당자가 근무하지 않는 날이라고 다른 사람이 봐준다고 했다. 그리고 기다리라고 했다. 40분을 기다렸다. 우리를 불러서 집무실로 찾아갔다. 르네는 유창하게 설명해줬고, 경찰관은 이해했다. 르네가 든든했다. 그리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얼마나 기다리라는 말은 없었다. '그냥 기다리래' 르네는 경찰관과 직원들의 말을 더 쉬운 스페인어로 천천히 우리가 이해할 때까지 통역해줬다. 우리는 르네의 손짓과 친절한 말로 상황을 알아들었다. 눈치껏.

 

경찰서에 첫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쯤이다. 9시 40분쯤에 출발하여 오는데만 50분이 걸렸다. 접수 확인한 것은 11시 넘어서였고, 그 뒤 2시간을 기다렸다. 2시간을 기다리는 중에 무언가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아무것도 없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하염없이 2시간 30분을 기다렸다. 

 

르네는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치며 우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어깨를 으쓱했다. 

 

'망할... 나도 모르겠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쿠바가 이렇단다.'라는 뉘앙스 같았다.

 

이야기 소재도 떨어졌다. 르네는 안절부절못하며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다. 점점 그 주기가 짧아지고 잦아졌다. 그러더니 30분씩 사라졌다 들어온다. 산책을 하며 전화로 수다를 떠는 모습을 봤다. 지겹겠지. 나도 미안했다. 미안해서 근처 구멍가게를 찾아 탄산음료를 사 왔다. 2개를 사서 하나는 쑤와 나눠 마시고, 하나는 르네에게 줬다. 르네는 고맙다고 했다. 시원한 탄산음료를 마시며 5분 정도 무료함을 달랬다. 

 

탄산음료도 떨어지고, 1시간 정도 지나자 나도 슬슬 신경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쑤에게 한마디 했다.

 

"마트에서 그러게 좀 더 신경 쓰지. 폰 잃어버려서 하루를 통째로 날리고 지겨워 죽겠다."

 

쑤의 도화선은 다 타버렸다. 난 진짜 말 그대로 박살 났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안 그래도 속상했던 쑤는 폭발 했고 난 쑤와 눈 한번 마주치지 못했다. 내가 괜한 말했다고 사과했지만 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1시간을 빌었다. 그 지옥 같던 1시간 후 경찰관이 우리를 불렀다. 

 

"곧 변호사가 옵니다. 더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50분~1시간이 또 지났다. 그사이 아바나 경찰서의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경찰서만큼 또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간신히 용건을 마치고 도망쳐 나왔다.

 

어느 쾌활해 보이는 중년 여성 1분이 경찰서에 들어왔다. 한쪽에는 도시락 통 같은 것을 들고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당차게 들어왔다. 반갑게 경찰관들과 인사를 나누고 비쥬를 했다. 쑤에게 빌고 빌다가 지쳐 나가떨어진 나는 '저 사람은 누군가'하면서 농촌의 한가한 소처럼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 여성분이 집무실에 들어갔다가 20분 있더니 나오면서 우리를 불렀다. 그리고는 어디로 가자고 한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르네가 알았다고 하고 따라가길래 우리도 같이 따라나섰다. 걸어서 1분도 채 안 걸리는 이웃 건물에 들어섰다. 고급 주택처럼 보이는 그곳은 검찰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검사가 있고 속기사 같은 분이 있는 그런 검찰청? 같은 곳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길게 뻗은 직사각형 테이블과 우아한 목재 의자가 즐비한 공간에 들어갔다. 나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쑤, 르네가 앉고 오른쪽으로는 변호사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느 젊은 남성분이 앉았다. 내 또래 정도로 보였다.

 

남자는 알비노였다. 흰머리에 붉은 눈이었다. 뭔가 멍하고 느릿하고 속세에 관심 없고 딴 곳에 정신이 있는 듯한 분이었다. 

 

일 진행은 진지하지만 뭔가 코믹했다. 변호사님이 열심히 스페인어로 진술서를 읽고 마구마구 설명한다. 우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알아듣는다. 알아듣지 못하는 부분은 르네가 친히 통역을 해준다. 여기서 통역이란, 천천히 또박또박 쉬운 스페인어로 말하고 열성적인 손짓으로 설명으로 바꿔주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조금 더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씨'라고 대답한다. 쑤는 열심히 준비했던 스페인어로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는 마트에 있었다. 돈을 지불했다. 내 휴대폰을 뒀다. 근데 그냥 나왔다. 3분 후 놀래서 다시 찾아가니 없었다.'

 

이 회의는 해당 진술서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 맞는지 당사자에게 확인하고 사건 접수자와 연락받을 사람을 르네에게 인계하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었다. 해당 사항들에 대해 맞는지 검증하고 마쳤다. 근데 그 알비노 남성분은 무슨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파일 폴더를 접었다 폈다 스프링을 만지작만지작하며 멍 때렸다. 이야기를 마치고 변호사님이 그분에게 말을 했다. 대충 "상황 다 파악되셨나요? 확인하셨죠?"라는 말 같았다. 그 사람은 마치 이제야 우리가 미팅 중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들고 '알겠다'라고 대답했다. "그럼 서명해주세요."하고 서류를 건네자 그는 읽지도 않고 바로 서명하고 다시 변호사에게 건넸다.

 

놀라운 점은 그 서명을 해준 분이 우리나라의 검사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분이었다는 것이다. 사건을 종결하기 위해서는 이 케이스에 대해 변호사와 검사가 함께 확인을 하고 서명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분은 검사였다. 아무리 무료한 쿠바 사회의 검사라지만 대단히 무료해보였다. 그에 비해 변호사분은 기운이 넘쳐서 더욱 대비되었다. 

 

중년 변호사는 경찰서에 들어왔던 그 당찬 모습 그대로 씩씩하게 '이것으로 마쳤습니다.'라고 말하고 나갔다. 우리도 따라 나갔고 경찰서에 돌아가니 모든 과정이 끝났다고 한다. 만약 휴대폰을 되찾을 경우, 르네에게 연락을 한다고 했다. 우리는 오전 10시 반에 도착해 2시 반 넘어서 끝났다. 4시간이 넘는 시간이었는데 정작 기다린 시간을 빼면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르네는 아침과 달리 꽤 지친 듯해 보였다. 같이 구아구아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쿠펠리아로 갔다. 쿠펠리아는 아바나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스크림 공원인데 버스들이 많이 서는 주요 정류장이다. 

 

우리와 함께 가며 거기까지 바래다준 후 르네는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아바나 공항 근처의 마을이라고 했다. 경찰서는 르네 집과 꽤 가까웠지만 우리를 위해 먼길을 와서 데리고 경찰서로 갔다가 다시 우리를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일부러 우리를 챙겨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해는 한창이었는데 우리 컨디션은 해 질 녘이었다. 하루를 마쳐야 할 것만 같은 기나긴 시간들이었다. 기다리다 지쳐 쓰러진다는 말을 이해했다. 아바나 대학교 근처의 식당에서 첫 끼를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푹 쉬었다. 그래도 무사히 일을 마치고 사건을 종결했다는 안도감이 들어서인지 쑤는 한결 풀어진 느낌이었다. 열심히 애교 부리고 눈치 보며 마음을 돌렸다. 여러모로 피곤하고 긴 하루였다. 

 

경찰서는 웬만하면 가지 않는 게 좋다. 어느 나라에서든, 어느 도시에서든 경찰서를 찾아야 하는 것은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바나에서도 역시 경찰서를 찾아갈 일을 만들지 않는게 좋다. 기다리다 지쳐 쓰러지기 딱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