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서 가장 젊은 곳은 어딜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쿠바에서 젊은 곳이 있나?라고 되묻는 사람도 있을 테고, 대학교! 초등학교! 등 학교를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나도 쿠바 여행을 하기 전에 쿠바에서 가장 젊고 힙한 곳은 어디인지 몰랐다. 아바나에 힙하고 재미난 곳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쿠바를 떠올리면 선입견으로 따라오는 것들은 흔히 시가, 올드카, 낡고 다양한 색깔의 건물들, 살사 댄스, 모히또 등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떠올린다면 그대는 문학인이고.
우리나라에는 이태원, 강남, 홍대 등 젊은 사람도 많고 유흥거리도 많은 핫한 지역구가 많다. 게다가 대림 미술관, 디뮤지엄이나 국립현대미술관 등 다양한 문화 전시 시설도 갖추고 있다. 런던에는 테이트 모던이 있고, 파리에는 조르주 퐁피두 센터가 있다. 나라마다 저마다의 힙하고 젊고 실험적인 문화 시설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사회주의 국가이자 가난한 나라로 알려진 쿠바에도 멋진 곳이 하나 있다. 바로 '파브리카 데 아르떼 쿠바노(Fabrica de Arte Cubano)'다. 쿠바 문화 센터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직역을 하면 쿠바의 예술 공장이다. 왜 공장이냐 하면, 이 문화 센터는 예전 식용유 제조 공장이었기 때문이다. 폐공장 시설을 재생한 재생 인테리어 시설이다. 원래 공장이었던 만큼 크고 각기 다른 건물들이 이어져있어서 돌아다니는 맛도 있다.
많은 여행자들이 택시를 타지만 나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구아구아를 타고 갔다. 호텔 베다도쪽에서 버스를 타고 근처 정류장에 내려걸었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길거리는 황량했다. 미국 서부의 어느 버려진 버스 정류장처럼 정류장 표시 막대만 서 있고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맵스미를 보며 쑤와 함께 5분 정도 걸으니 사람들이 보였다. 대로변에는 사람이 없는데 작은 골목과 가정집 근처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역시나 쿠바 사람들답게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한창 걸으니 멀리서 공장 굴뚝이 보였다. 저기가 바로 파브리카 데 아르떼 쿠바노다. 건물 담장 벽에는 다양한 그라피티 작품들이 그려져 있었다. 유쾌하고 재밌는 그림이 많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찍기도 했다. 입구 앞에는 폐차를 활용한 예술 조형물이 있었다. 비틀스 노래가 나오는 폐차였는데 자세히 보니 딱정벌레처럼 꾸며놨다. Beatles로 언어유희를 담은 듯했다.
쑤와 나는 저녁을 먹기 위해 미리 봐둔 식당으로 올라갔다. 파브리카 데 아르떼 쿠바노와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일명 박물관 내 식당인 셈인데 루프탑이라 분위기도 좋아보였다. 옥상에서 해물 모듬 꼬치와 고구마 튀김을 먹고 배를 채웠다. 테라스 뒤편으로 가파른 계단이 있고 그 위를 올라가면 한 층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거기서 해 지는 석양을 바라보니 로맨틱했다. 쑤와 함께 붉게 물드는 아바나를 구경한 뒤 전시회로 들어갔다.
전시회는 익살 맞고 재밌는 작품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사진이나 현대 미술 작품이 많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현대미술관보다는 대림미술관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 작품보다는 대중문화와 팝 요소가 더 많았다. 그렇기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공장이었던 탓에 공간이 큼직하게 나눠져 있고, 별관들이 각각 연결되어 있었다. 문을 열 때마다 전혀 다른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어떤 문을 열면 현대 예술 조형물이, 어떤 문을 열면 사진 전시회가, 어떤 곳에 다다르면 소극장 무대가 나온다. 파브리카 데 아르떼 쿠바노에서는 프로그램 편성이 다양하게 되어 있는데, 연극과 콘서트, 디제잉이 열린다.
쑤와 나는 야외 테라스에 앉아 건너편 흰 벽에 빔 프로젝터로 쏘아 상영하고 있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를 한참 바라보며 쉬었다. 무성 영화를 야외에서, 공장 흰 벽을 통해 감상하고 있으니 색달랐다. 공장 배경인 영화를 공장에서 볼 줄은 몰랐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 닭살이 돋았다. 다시 실내로 들어가니 1인 연극을 하고 있다. 쿠바 출신 복서로 미국 프로 선수로 활약했던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였다. 스크린으로 영어 자막을 보여주고 있어 내용 전개는 이해되었다. 1인극은 평생 처음 봤는데 그 정도로 몰입도가 있을 줄 몰랐다. 그것도 스페인어로 하는데. 남자 배우 혼자서 '초콜라떼'라는 별명을 가진 프로 선수를 연기하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때론 웃기도, 때론 같이 침울해지면서 연극에 흠뻑 빠져 구경했다.
연극을 모두 보고,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 사람 1인분의 연기를 꼭꼭 씹어 소화한 느낌이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딱 좋은 1인극이라 생각하며 다른 무대가 있을 장소로 이동했다.
어두운 홍대 클럽을 연상하는 스테이지에서는 텔마리라는 래퍼의 콘서트가 준비 중이었다. 어느 MC와 함께 잠깐의 토크쇼를 마치고, (동시에 팟캐스트로 라이브 상영되는 듯하였다) 콘서트를 시작했다. 텔마리는 쿠바인 여성 래퍼인데, 쿠바 전통 복장을 입고, 쿠바 특유의 멜로디에 기반한 랩핑과 노래를 선사하는 가수였다. 신나고 흥겨웠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멜로디와 비트는 내 어깨를 으쓱으쓱 따라 흔들게 만들었다.
11시가 다 되어가는데 노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스테이지는 뜨겁게 달아올라 몸에서 흘러나온 땀이 옷을 젖게 만들었고, 젖은 옷은 내 몸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쑤도 지친 나머지 계속 앉아있었다. 나는 다른 행사는 없고 이제 이게 끝인 줄만 알았고 아쉽다고 조금 더 버티자고 했다.
지치다 못해 축구 경기를 마친 선수처럼 푹 젖은 채 발을 질질 끌며 나왔는데 '이럴 수가!?'
밖에서는 클러빙을 하고 있었다. 왕년 클럽 죽돌이였던 나는 신이 나서 구경했는데 이렇게 새삼 힙한 클럽 스테이지는 처음 보았다. 내가 아까 보았던 예술 작품들 사이에 암막을 치고 사이킥을 틀고 DJ가 부스를 만들어 노래를 틀고 있었다. 미술 작품들 사이에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춘다. 세상 어느 클럽을 가도 예술품 옆에서 놀 수 있는 곳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파브리카 데 아르떼 쿠바노말고는.
이미 지쳤지만 축구 경기 후반전 인저리 타임을 받은 선수처럼 마지막 5분을 위해 뛰었다. 힙합과 EDM 음악에 맞춰 열심히 춤추고 놀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갔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 구아구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12시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미 내 몸은 밤샘을 한 상태와 같았다.
쿠바에서 가장 핫한 곳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나는 유일무이하게 파브리카 데 아르떼 쿠바노를 꼽을 것이다. 예술품 사이에서 클러빙을 한 것도 잊을 수 없고, 1인극을 본 것도, 야외에서 찰리 채플린 무성 영화를 본 것도, 쿠바 래퍼의 공연을 즐긴 것도, 모두 잊을 수 없었다. 정말 여기는 쿠바의 예술 문화 공장이었다.
공장에서 공장 배경의 영화를 본 것도, 비틀스 노래가 나오는 딱정벌레 모양의 폐차 조형물도 쿠바의 유치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작품도 귀여웠고, 경제가 힘들고, 딱딱한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변화를 꾀하고 도전하는 쿠바 예술인들이 고맙기도 했다. 이제 누구든 쿠바의 예술 문화를 무시한다면 '파브리카 데 아르떼 쿠바노'는 알고 말하냐고 감히 따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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