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 '남아있는 나날'을 읽었다. 2017년이 저물어가고 2018년이 다가오는 때에 읽었다.
사실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기 전에는 이시구로를 알지 못했다. 어느 정도냐 묻는다면, 올해 노벨 문학상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아, 내가 아는 현존 유명 일본 소설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인데 더 있었구나. 어떤 사람이지?'일 정도였으니.
일본은 정말 출판 강국에 문학 선진국이나 하는 약간의 부러움과 함께 금방 잊었다. 그러다 문득 회사에서 떠올라 몰래 구글에서 찾아보니 일본계 영국인이었다. '영국과 일본의 조합이군.'
작가를 알게 된 계기를 소개한 이유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달리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한 칭찬 혹은 찬양, 비판 등 다른 사람들의 평판을 알기 전에 소설을 먼저 접했다고 알리고 싶었다. 그만큼 편견 없이 오롯이 소설에 대한 감상을 담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남아있는 나날은 노년을 바라보는 중후한 집사 스티븐스의 첫 여행기다. 정확한 나이는 나오지 않으나 주변 사람의 반응을 보아 지긋이 나이 먹은 중년은 맞다. 그는 집사라는 직업을 평생 업으로 생각하며, 훌륭한 집사가 되기 위한 일념 하에 살아간다. 아버지의 엄청난 감정 절제력과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사 일에 몰두했던 모습은 스티븐스의 직업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
옛날 함께 일하던 여자 총무의 편지로 그는 여행을 결심한다. 관대한 미국 주인이 여행을 허락해준데다 자동차와 일체 경비를 대준다. 소설 '남아있는 나날'이 아이러니하다고 다가온 이유는 줄거리 설명에 있다. 그는 편지를 읽고 여행을 결심하고, 여행 중에도 항상 과거를 회상한다. 여행기라기보다는 여행 중 자신의 과거에 대한 독백이 맞을지도. 고급 자동차로 영국 시골을 지나 풍경을 보고 여자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놓쳤던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늙어버린 그녀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동시에 절대 온전히 표현하지 않는 그의 절제력은 변함없다. 다만 그는 결심한다. 유머의 중요성에 대해 고민하며, 새 미국 주인의 입맛에 맞는 농담으로 대답하겠다고.
자신의 삶과 커리어가 통째로 거부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에 따른 질문. 나는 과연 잘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커리어의 정점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주인을 성공적으로 도우면서 그 영광을 그림자처럼 뒤에서 함께 누린다. 그는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으나(유럽 주요국의 외무부 장관과 주요 인사들을 대접하였으므로), 반대로 전쟁 후 주인이 나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때 스티븐스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날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그때와 다른 지금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미국 주인의 농담을 받아치기 위해 공부하고, 젊은 시절 사랑을 찾아 떠난다. 하지만 답을 전하지는 않는다. 그저 담담히 한 사람의 여행과 지난 삶을 비추고, 독자는 찬찬히 함께 스며든다.
취향을 떠나 소설이란 장르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사실 소설과 시, 문학은 어떤 이가 보기에 쓰잘데기없는 분야다. 돈(경제), 정치, 과학 등 삶과 직결하지 않으면서 시간 때우기처럼 보이는 실용적이지 못한 도서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담담하게 세밀한 묘사와 이야기 전개로 말한다.
한 사람의 삶과 그 시대를 조용히 비춰 보고 곱씹어 보고, 주인공의 눈으로 타인과 세상을 보기에 이만큼 좋은 매체는 없을 것이다. 라고.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스티븐스의 지나왔던 나날을 함께 했고 남아있는 나날을 고민했다. 이만큼 충분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 괜찮은 소설이고 깔끔한 소설이다.
나도 언젠가 읽는 이가 조용히 현재 세상을 잊고 주인공을 따라 새로운 세계 그렇지만 더욱 현실같은 세계를 따라오게 하고 싶다.
가만히 손을 잡고 '내가 생각한 세상은 이래. 현실과 다르지 않아.' '많이 아프기도. 오히려 놀랍게도 덤덤함을 유지하기도, 그리고 지질하고 모자라기도 하지만 지금 누구나 그렇지 않냐고.'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소설을 읽고 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개인을 주목하고 시스템을 차분히 밀어내고, 날 어지럽게 하는 주위를 조용히 차단할 시간과 공간. 내가 제공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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