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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문학

책 리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없는 남자들을 읽고

by cardo 2020. 3. 30.

개인적으로 단편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 이르러 끝을 맺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단편을 접할 때는 적응하지 못했다. 다음 기회에 쓰겠지만, 내 첫 도서는 위인전이었고, 소설은 해리포터다. 연대기를 다룬 내용이 나에게 가장 익숙한데다 단편에서는 발단-갈등-절정-맺음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차츰 소설이란 형태의 이야기가 눈에 익고 머리도 늙고 영악해지면서 뻔한 장편 소설보다는 중-단편 소설에 눈이 더 갔다. 요즘 길게 집중해서 이야기를 음미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은 적절한다. 익숙한 소재의 참신한 발상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는 짧게 흘러가고, 매 단편마다 적합한 흡입력을 가졌다.

 

스코틀랜드 화가 폴 가드너가 말했다. "그림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흥미로운 곳에서 멈출 뿐이다."

 

소설가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서 '나는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원고지14매 정도의 산문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는지 물어본다. 대답은 간단하다. "글을 쓰기 시작하여 원고지 14매가 되면 멈춘다." 하루키의 단편은 하루키스러운 스토리텔링이 딱 단편 분량에서 정지한 느낌이다. 분명 끝을 이은 다음 이야기가 존재할 듯 하지만 단편은 멈추고, 그 멈춤을 즐기라 한다. 나는 즐겼고 모두가 즐기길 바란다.

 

드라이브 마이 카

주인공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알았지만 그녀가 죽을 때까지 물은 적 없다. 그녀의 예전 외도 상대와 술을 마시고 술친구로 지낸다. 아내가 죽은 지 꽤 흘러 음주운전으로 운전을 못한다. 그래서 운전기사를 고용하는데 그녀는 미사키다. 말이 적고 담배를 엄청 피는데, 운전은 왠만한 남자보다 잘한다. 이내 과묵한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가후쿠는 자신의 아내와 그 외도 상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밑줄 친 구절
"하지만 가후쿠씨,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 해도."
마사키는 차창을 내리고 시가 라이터로 말보로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연기를 깊이 들어마시고 맛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폐에 머금고 있다가 창밖으로 길게 토해냈다. "명줄 줄이는 짓이야." 가후쿠가 말했다."사는 것 자체가 명줄 줄이는 거잖아요." 미사키가 말했다.

예스터데이

주인공 다니무라는 간사이 지방에서 상경한 도쿄에 위치한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다. 아르바이트 중 기타루를 만난다.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자기 멋대로 바꿔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와세다 대학을 목표로 삼수를 하지만 공부는 하지 않고 그냥저냥 보낸다. 초등학교 때부터 만난 여자 친구가 있는데 주인공에게 소개를 시켜준다고 말한다. 세월이 흘러 우연히 기타루의 당시 여자 친구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다.

밑줄 친 구절
"시간의 속도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어긋날 수도 있어." 나는 말했다.
"여느 사람과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매우 순수하고 정직하게, 하지만 자기가 뭘 찾고 있는지 스스로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거겠지."
화분이 채 감당하지 못하는 강한 식물처럼.
어제는/내일의 그저께 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

독립기관

위대한 개츠비가 떠오르는 방식의 스토리 전개다. '나'는 썩 잘 나가고, 잘 사는 성형외과 '도카이'를 알게 된다. 함께 스쿼시를 치며 술도 같이 마시는 사이다. 도카이는 한 가지 여성 편력이 있는데, 결혼을 절대 하지 않고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임자 있는 여자를 만나며, 주로 유부녀다. 그런 그가 한 여자와 사랑을 느끼고 그런 자신을 거부하며 서서히 말라간다.

밑줄 친 구절
물론 그런 비참한 케이스만 있는 건 아니다. 이 넓은 세상에는 자식과 부모가 시종 양호한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도 
대략 축구경기에서 헤트트릭이 나오는 빈도로 존재한다.
'세상에는 예의 바른 사람과 재치 있는 사람이 있어. 물론 둘 다 훌륭한 자질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의보다 재치가 이기지.'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 그런 노력을 하는 중이에요." "무슨 이유로요?" "지극히 단순한 이유예요. 너무 좋아하면 마음이 힘들기 때문이죠. 못 견딜 만큼 힘들어요." "우선 그녀의 네거티브란 면이 잘 떠오르지 않아요. 실은 그런 네거티브한 부분에마저 내 마음이 끌렸던 거니까요. 또 한 가지는, 무엇이 필요 이상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도 잘 분간이 안 간다는 겁니다. 그 경계를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분별없는 마음은 난생처음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당신은 그녀를 너무 좋아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동시에,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고 간절히 바라는 것 같군요."
추측은 내 마음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에요.
자기 자신을 제법 공정하게 바라볼 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을 남 앞에 드러내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지 못한 자질이었다.
"나는 대체 무엇인가, 요즘 자주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사랑과 이별을 겪으면 드는 생각이다. 
"한낱 맨몸뚱이 인간으로 세상에 툭 내던진다면, 그때 나는 대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겠어요. 그녀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지 않을 때, 만날 수 없을 때, 내 안에서 그런 분노가 고조되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게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 스스로도 잘 파악이 안 돼요.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을 만큼 격한 분노입니다."

셰에라자드

'셰에라자드'라고 하우스에 찾아와 살림을 돕고 성관계를 맺는 그녀의 정체는 일반 가정부다. 매번 성관계 후 기묘한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중학생 시절 자신이 동경하던 남자애 집에 몰래 들어가 물건을 두기도, 그의 물건을 훔쳐오기도 했던 기억을 이야기한다.

 

기노

기노는 육상화 세일즈맨이었다. 출장에서 하루 일찍 돌아온 날 아내의 외도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고, 그는 차분히 이혼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정리한다. 놀랍게도 큰 감정 기복을 느끼지 못하고 떠난다. 이모의 2층 집에서 1층에 가게를 열고 운영한다. 단골손님 중 기이한 기운을 풍기는 가미타라는 손님이 있다. 가게를 운영하며 여러 에피소드가 있고 그 중심에는 가미타가 있다. 그리고 불길한 징조를 띄는 현상을 몇 번 부딪치고 때마침 가미타는 기노에게 최대한 멀리 떠나서 한참을 떠돌다 그가 오라고 할 때 돌아오라고 한다.

밑줄 친 구절
그날 밤은 비가 내렸다. 빗발이 그리 굵진 않지만 멎을 조짐이 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가을장마였다. 여러 말을 되풀이하는 단조로운 고백처럼 단락도 없고 강약도 없다.
베갯머리의 유리창이 가느다란 물방울로 뒤덮이고, 물방울은 줄줄이 새것으로 바뀌어갔다.
주위는 달의 뒷면처럼 고요히 가라앉았다.
하늘에는 말라죽은 별자리가 거뭇거뭇 떠 있을 뿐이다.
그래, 나는 상처 받았다. 그것도 몹시 깊이, 기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어둡고 조용한 방 안에서. 그동안에도 비는 끊임없이, 싸늘하게 세상을 적셨다.

사랑하는 잠자

카프카의 '변신'의 뒷 이야기를 상상한 듯하다. 벌레가 된 잠자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고, 북새통인 프라하를 배경으로 그렸다. 열쇠 수리공의 딸은 꼽추인데 그 와중에 집안 남자들을 대신해 수리를 하러 방문한다.

밑줄 친 구절
그는 왠지 모르게 그걸 알았다. 그것은 추측도 아니고 지식도 아닌 완벽하게 순수한 인식이었다. 그런 인식이 어디서 어떤 경로를 밟아 찾아오는 것인지 잠자는 알지 못했다. 그것 또한 순환하는 기억의 일부인지 모른다.
아가씨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리고 안개가 서린 먼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생각하고 그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속이 아련히 따스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물고기나 해바라기가 아니란 사실이 점점 기쁘게 다가왔다.

여자 없는 남자들

한밤 중에 어느 남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신의 아내가 죽었음을 밝힌다. 그녀는 한때 만나던 여자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추억한다. 그리고 이 세상 여자없는 남자들을 생각해본다.

밑줄 친 구절
물론 그녀는 믿지 않았다. 내 목소리에 죽은 자의 기척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열네 살이고, 갓 만들어진 무언가처럼 건강하고, 당연히 따뜻한 서풍이 불 때마다 발기했다.
모든 방향에서 불어오는 모든 바람을 싹 지워버릴 만큼 멋있었다.
아무튼 엠은 내가 열네 살 때 사랑에 빠졌어야 하는 여자라는 것이다.
그녀 안에 존재했다. 주의 깊게 시선을 집중하면 나는 엠 안을 오가는 그 소녀의 모습을 언뜻언뜻 엿볼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남자는 역시 그녀의 남편일 것이다. 나는 그 자리를 그를 위해 남겨둔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 후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버리면 그 고독의 빛은 당신 몸 깊숙이 배어든다.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의 얼룩처럼. 당신이 아무리 전문적인 가정학 지식을 풍부하게 갖췄다 해도, 그 얼룩을 지우는 건 끔찍하게 어려운 작업이다.
어디까지나 얼룩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얼룩의 자격을 지녔고 때로는 얼룩으로서 공적인 발언권까지 지닐 것이다. 당신은 느리게 색이 바래가는 그 얼룩과 함께, 그 다의적인 윤곽과 함께 생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그 세계에서 소리가 울리는 방식이 다르다. 갈증이 나는 방식이 다르다.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때로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여자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