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바나에서 장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는 아바나의 둘째 날이었다. 목이 너무 말라 일요일 아침부터 생수를 사기 위해 길을 나섰다. 숙소 근처에 슈퍼마켓이 어디 있는지 몰라 한참을 헤맸다. 아바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게 낯설었고, 아바나의 슈퍼는 큰 간판이나 '나 슈퍼마켓이오'하고 알리지 않기 때문에 찾기 어려웠다.
맵스미를 통해 찾아간 곳은 주유소 옆 꽤 크고 최신 느낌의 마트였다. 편의점에 가까웠는데 물건이 많아 보여 기대했다. 출입문에서 가드에게 가방을 보여주고, 맡기고,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갈 수 있다. 마치 클럽 같다. 아바나에서는 절도가 빈번한지 절대 가방을 지니고 마트에 출입할 수 없다. 절대로. 반드시 가방을 맡겨야 하는데 돈을 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런 큰 곳도 생수가 없었다. 생수가 없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될 현대인들이 많을 것이다. 쿠바에서 생수 생산 브랜드는 한 곳이다. 단 한 곳에서 독점하고 이 곳은 국영기업이다. 우리나라처럼 롯데 아이시스가 품절이면 삼다수를 살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다(사실 품절 현상마저도 보기 드물다). 냉장 및 냉동제품 칸도 휑하다. 상품들로 채워진 모습을 보기 힘들다. 썰물이 한창일 때 갯벌처럼 바싹 말라 휑한 냉장고만 볼 수 있다.
현지인에게 물어 다른 마트를 찾아갔다. 호텔 아바나 리브레 근처에 큰 마트가 있는데 거기에는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맵스미로 방향을 잡으며 10분을 걸었다. 목이 너무 말랐고, 콜라나 주스 따위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 시원할 필요도 없고 그냥 미지근한 생수라도 간절했다.
오후 1시쯤 되어 다른 마트에 도착했다. 물이 없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물이 없다고 한다. '노 아구아'. 내가 '돈데 아구아'라고 물었다. 소리는 높이지 않았지만 거의 절규에 가까운 한 마디였다. '어디에 물이?'라고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여기서 쭈욱 직진을 더 하면 편의점이 있는데 거기에는 아마 있을 수도라고 알려줬다.
또 10분을 걸었다. 아바나 리브레에서 내려와 말레꽁이 보이는 길을 걸었다. 말레꽁과 함께 조금 걸으니 편의점이 보였다.
오후 2시였나 3시에 문을 닫는다고 알려줬다. 사회주의 국가답게 일요일 오후 2시면 일제히 모든 상점이 닫힌다. 아마 관광객이 많은 올드 아바나는 여는 곳이 더러 있을 수도 있겠다. 내 숙소와 돌아다닌 곳은 베다도였다.
편의점에 도착하니 줄이 있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져 아슬아슬하다. 다행히 편의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꽤나 다양한 제품군을 지나 생수를 발견했다. 그마저도 1L나 2L짜리가 아닌 500ml였다. 4병을 고리고 탄산음료도 2개 골라 계산했다.
미지근한 것이 시원찮은 상태였는데 한 병당 1쿡이었다.
마트에 나와 벌컥 마셨는데 웬걸 맛이 비렸다. 자동차에 오래 보관한 미지근한 플라스틱 생수병에서 나는 맛이다. 그래도 목말라서 마시긴 했는데 마실수록 역겨웠다. 생수 맛이 다 이런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단, 생수가 매일 구할 수 없는 제품은 틀림없었다.
이날 이후 비교적 저렴하고 시원한 생수를 볼 때마다 구매했다. 망설이지 않았다. 보이면 구매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숙소와 가장 가까운 마트를 방문해 생수가 들어왔는지 확인했다. 일주일에 1번 들어와 있으면 자주 들어온 것이라 미리 구매해뒀다. 올드 아바나 지역에는 관광객 대상으로 가내 소매점이 있어 구매하기 편할 것이다. 가정집에서 미리 생수를 구매하고 얼린 뒤 웃돈을 얹어 파는 경우가 많다. 많이 비싸지 않으니 구매할만하다. 500원 아끼겠다고 망설이다가는 물 찾아 3만 리 찍게 된다.
하루는 5L 생수를 발견하여 얼른 구매하여 집에 보관했다. 두고 두고 덜어 마셨는데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왜 인간이 사냥 채집의 유목 생활에서 농업 혁명을 일으켜 정착하게 되었는지 조금 이해가 되었다. 매일매일 물을 찾아 헤매면 참 골치 아플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커피를 내려 마실까 가 아니라 어디서 물을 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꽤 큰 차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유목생활을 괜찮게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선조님들이 농업 혁명을 한 이유가 이게 아닐까 하며 당시의 상황을 공감했다. 역사를 돌이켜 선택지를 제공한다고 해도 인간은 역시 농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식량을 찾아 헤매기보다는 한 곳에 식량을 보관해두고 꾸준히 생산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쿠바 현지인들은 생수를 잘 구매하지 않는다. 현지인들의 물가 기준으로 꽤 비싸다. 끓여 마시거나 정수통으로 정수해서 마시는 듯 했다. 한 병에 1쿡하고, 5L가 3 쿡인가 했으니 한 가족이 생수를 사 마시기에는 부담이다. 그래서 생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가 싶어도 다른 제품들을 보면 생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제품들도 공급이 원활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한달가량 체류해보니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군은 거의 복불복이다. 현지인들은 어떻게 기가 막히게 정보를 아는지 특정 물품이 들어오는 날이면 마트 앞에 길게 줄 서 있다. 하루는 식용유를 구매하기 위해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마트에서 나오는 현지인 모두가 식용유 하나씩 안고 있었다. '오늘은 식용유 들어온 날이구나'하고 알 수 있었다.
식용유도 그렇고, 우유도 그렇다. 한달을 지내며 우유를 딱 한 번 구매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종적을 감췄다. 우리가 현지 정보에 밝지 않아서 찾지 못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다면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말 아니겠는가. 쿠바에는 정말 여러 가공 식품이 부족하다. 공산품이 흔하지 않다는 건 정말 사실이다.
마트도 우리나라가 아닌 멕시코와 비교해도 훨씬 상품 가짓수가 떨어진다. 사회주의 체제라 국영기업 한 개가 독점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없는 제품군이 많고, 수량도 부족하다.
반면 현지 농산물이나 빵이나 지역 경제를 기반으로 돌아다니는 제품군은 부족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숙소 인근 야채가게 2 곳은 항상 농산물을 내놓고 있었고, 쌀집이나 빵가게는 항상 판매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하다. 대형마트에 들어가는 가공 식품군 즉 생수, 우유, 참치캔, 냉동 가공식품, 식용유 등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들은 가격도 비싼데다 장보기도 복불복이다. 있는 날이 있고, 없는 날도 있다.
쿠바 슈퍼마켓 사장님께 "여기는 무엇을 파나요?"라고 물으면 "없는 것 빼고 다 있어요"가 아니라 "있는 날에는 있고 없는 날에는 없어요"라고 답할 것이다.
쿠바 여행을 길게 하는 여행자라면 생수 정도는 미리 확보해두면 좋다. 그리고 원하거나 필요한 상품은 보이면 고민 없이 구매하길 추천한다. 만약 당신이 아바나에 일주일 정도 체류한다면, 남은 기간동안 다시는 그걸 못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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