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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문학

책 리뷰: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찰스 부코스키

by cardo 2020. 5. 9.

내가 제일 재밌게 본 영화 중 하나를 손꼽으라면 두 번째 집게손가락쯤에 위치할 영화는 '기사 윌리엄'이다. 중세 배경으로 은근히 현대적 요소를 섞은 스토리에, 주인공 히스 레저의 시원한 외모와 연기 그리고 곳곳에 위치한 미소 포인트 등 골고루 마음에 드는 영화다. 

 

영화에서 음유시인 캐릭터가 한 명 나온다. 첫 등장부터 심상치 않다. 벌거벗겨 쫓겨난 채로 노래를 부르다 주인공을 만나고, 술과 여자에 빠져 살지만 비상한 머리와 뛰어난 세 치 혀놀림으로 먹고사는 인물이다. 가진 것은 없으나 원하는 것을 가지며, 집은 없으나 행복하게 떠도는 음유시인이다. 주인공이 경기에 참가할 수 있도록 크나큰 역할을 하기도 하며, 대결 전 현란한 찬사를 능숙하게 노래한다.

 

갑자기 왠 '기사 윌리엄'이냐면, 여기 나오는 음유시인이 현대에 다시 태어나 시집을 썼다면 꼭 이럴 것 같은 책이 바로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다. 현대 시는 전위적이며, 실험적이다. 언어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점점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만큼 대중과 거리는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마치 현대의 개념 예술 같다.

 

그런 시들과 별개로 찰스 부코스키는 시원시원하고 단순하고 웃기지만 가끔 번개같이 내리꼿는 명석함을 자랑하는 시를 썼다. 일단 재밌다.

 

배고픈 작가는

괜찮아도

배고픈 작가가 술을 마시는 건

괜찮지 않았다

술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았다

 

예전 중세의 음유시인이나 근대의 방랑객 시인이 떠오른다. '망할 천한 여자 같으니라구', '술은 어디 있는 거야?',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 시를 쓰고 싶고, 시 쓰느라 이 염병할 짓을 하고 있다니'라는 구절을 툭툭 내뱉는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만큼 쉽고 재밌다. 그리고 짧디막해 운율도 더 살아나는 것 같다. 최근 읽은 시들 중 가장 직설적이면서 유쾌했다.

 

'작가라면 거의 누구나

자기 글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는

 

그것은 흔한 일이다

 

바보가 되는 건

흔한 일이다.

 

그 순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종이를

찾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여보게, 공기와 빛과 시간과 공간은

창작과 아무 관련이 없고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않아

새로운 변명거리를 찾아낼 만큼

살날이 길다면

또 모르지만

 

소멸할 존재라는 자각은

가끔 사람을

이상하고

일터에 부적합한 인간으로

자유

기업의

노예이기를 거부하는

불쾌한

인간으로

만든다.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국내도서
저자 : 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 / 황소연역
출판 : 민음사 201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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